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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최초 해조류 김연구 영국 여성과학자 캐슬린 드루베이커(1947)

한국인이 김을 풍족하게 먹게 된 배경에 의외로 영국 여성과학자가 있다. 성함은 캐슬린 드루베이커이다. 이분이 1920년부터 김 연구를 체계적으로 하고 김의 일생에서 특히 김 씨앗의 생육과정을 1949년 기록으로 남겼다.

일본이 태풍이 초토화 되었을 때 이를 차용하여 김 씨앗을 뿌려 키우는 방식으로 자국 김양식을 부활시켰다. 한국도 이를 창조적으로 받아들여 김 양식을 더 발전시키고 그로 인해 김양식이 발전해서 식탁에 김이 풍부하다.

필자 소개

어쩌다보니 런던에 살고 있어요. 타국에서 한국인으로서 일상에서 보고 느끼는 영국영어와 영국문화에 대해 글을 씁니다. 영국영어는 미국영어의 모태어이고 특유의 억양이 인상적이에요.

영국은 여전히 왕이 있고 53개국 영연방이 유지되는 점도 매우 신기해요. 영어와 영국문화에 흥미가 있는 분들이 이 글을 읽으면 영국을 좀더 이해할 수 있고 지식과 경험의 지평을 넓힐 수 있어요.

이번 편은 우리가 김을 풍족하게 먹게 된 배경이에요. 영국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알고 보니 캐슬린 드루베이커라는 영국 여성과학자가 김을 최초로 체계적으로 연구를 해주셔서 김양식의 기반이 마련되었어요.

1. 조선왕조에서 왕만 드셨던 귀한 김

돌이켜보면 고국에서 김을 착한 값에 원 없이 몇십 년 맛있게 먹고 먹고 또 먹다가 질렸다. 그러던 것이 타국 영국에서 살다 보니 김 귀한 줄을 알게 되었다. 김밥 생각이 간절하고 김자반에 밥을 비벼 먹고 싶어 진다.

영국의 웨일스에서 김을 채취해서 넣고 빵을 만들어 먹긴 하지만 영국인은 전통적으로 해조류를 즐겨 먹지 않는다. 영국인뿐 아니라 유럽인은 해조류를 잘 모르는 데다 즐겨 먹지 않는다. 그래서 영국 식료품에 있는 김제품은 비싼 일본수입산이다. 최근에 한국산 김도 들어와 기쁘다.

조선시대 김은 나라에 바치는 귀한 진상품이었다. 성인 양민이 군역 대신 납부하던 군포가 1년에 2 필이었을 때 김 1첩은 양민 열 명의 군포값에 해당될 만큼 비쌌다. 이랬으니 평민들은 김 한번 먹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이렇게 비싸고 귀했던 김이 어떻게 흔한 밥반찬이 되었을까. 김 수확량을 늘리고 물양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이 있었다. 특히 20세기초 경력단절까지 겪고서도 홍조류 연구를 꿋꿋이 해낸 영국의 여성과학자 캐슬린 드루베이커가 남긴 연구가 결정타였다.

2. 1949년 영국인 캐슬린 드루베이터의 김연구

캐슬린 메리 드루베이커(Kathleen Mary Drew-Baker)는 1901년 11월 6일 영국 랭커셔에서 농기계 제조업자의 첫째 자식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 윌트셔의 솔즈베리(Salisbury)로 이사를 가서 그곳에서 워즈워스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일찍 자연과학 분야에 눈을 떠서 상급학교에 진학해 더 공부해서 식물학자가 되고 싶었다. 당시는 부유한 집안에 태어나도 여성은 상급학교 교육을 받기 힘든 시대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세계 최초로 영국에서 여성운동이 시작되었다.

캐슬린은 평범한 가정출신이어서 집에서 학비를 댈 여유가 없었다. 게다가 가족 중에 자연과학을 이해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럼에도 어떻게든 꿈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 해나가야 했다.

치열한 노력 끝에 지역 장학금을 받게 되어 맨체스터 대학에 진학했다. 바라던 대로 식물학을 배우게 되어 기쁜 마음에 밤잠도 잊고 공부에 매진했다.

그 결과 1922년 여학생 최초로 맨체스터 대학의 1등급 우등졸업생이 되어 애슈번홀 펠로십(fellowship, 특별연구원 지위)을 받았다. 졸업과 동시에 식물학과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며 석사과정을 시작했다. 매우 열심히 해서 바로 다음 해 석사과정을 속성으로 마칠 수 있었다.

캐틀린 드루베이커. nationalgeographic

이 무렵 캐슬린의 관심사는 홍조류에 집중됐다. 김이 대표적인 홍조류이다. 1925년 영연방 펠로십을 받게 되어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에 2년간 머무르게 되었다. 미국 태평양 바다의 홍조류 샘플을 채집하고 연구했다.

맨체스터로 귀국해서는 연구를 계속할 수 없었다. 결혼을 했기 때문이다. 학술기관과 대학교들이 결혼한 여성을 채용하지 않던 시대였다. 캐슬린처럼 탁월하게 연구성과를 계속 내는 연구원이라 해도 일단 결혼하면 해고당했다.

학자로서 홍조류 연구를 계속하려면 캐슬린은 어떻게서든 맨체스터 대학에 적을 두고 남아야 했다. 다행히도 이전에 받았던 애슈번호 펠로십이 있어서 명예연구원이 될 수 있었다. 보수가 없어도 연구를 할 수 있어서 마다할 수 없었다.

캐슬린은 대학 한구석에 작은 연구공간을 얻어 연구를 해가며 식물학과에서 강의 기회도 놓치지 않았다. 급여도 없고 교수직급도 못 달은 상태에서 연구비를 충당하기 힘들었다. 해조류 연구에는 해수 탱크가 꼭 필요했다.

새것을 살 돈이 없어서 직접 만들었다. 수제 탱크로 홍조류가 어떤 환경에서 자라고 어떤 형태를 구축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번식하는지 연구를 계속했다. 그렇게 1924년부터 1947년까지 홍조류에 대한 논문 47편과 책을 여러 권 출간했다.

3. 영국 웨일즈 전통적인 김빵과 캐슬린의 김 양식 연구

보수가 없는 연구직이라 캐스린은 세계 여러 지역에서 김 샘플 채집탐사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환경에 굴하지 않고 방법을 찾아냈다. 맨체스터 해안지방에 자라는 식용 해조류 포르피라(Porphyra umbilicalis, 영국 자생김)가 떠오른 것이다.

이것은 웨일즈 전통음식인 레이버 브레드(김빵, laver bread)의 주재료였다. 웨일즈 사람들은 김을 조미김의 형태로 먹는게 아니라 페이스트(액체) 형태로 빵에 발라 먹거나 빵 반죽에 넣어 구워 먹는다. 또한 베이컨과 함께 기름에 볶아 먹기도 한다.

그러나 런던에서는 이런 웨일즈 음식은 보기 힘들고 식재료로 판매하지 않아 사 먹을 수 없다. 게다가 말려서 가공한 조미김이 아니어서 맛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좀 걸린다.

캐슬린은 이 맛있고 영양 많은 홍조류 김의 생태에 주목했다. 당시만 해도 세계 어느 곳에서도 해조류의 번식이나 생애주기에 대한 연구가 전무한 상태였다.

같은 시기에 일본과 한국은 이미 김을 대나무 발이나 덤불을 이용해 양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위적으로 김의 씨를 뿌려서 길러내는 방법까지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서 수확을 늘리기도 힘들었고 1년 수확량도 들쭉날쭉 했다.

캐슬린은 영국의 김인 포르피라의 일생에 대해 연구했다. 포르피라도 번식을 했으나 2배체(염색체 한쌍을 가진 개체)인 과포자를 만들 뿐이었다. 그렇다면 포르피라를 만들어내는 각포자)는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여전히 의문이었다.

과포자는 분열한 수정란이 만드는 포자이고 각포자는 조개껍데기를 뚫고 자라는 포자이다. 캐슬린은 거듭 찬찬히 관찰해 갔다. 연구과정에서 포르피라의 주변에서 흔히 굴이나 맛조개에 파고들어 가는 분홍빛 도는 작은 곰팡이 형태의 조류인 콘코셀리스에 주목했다.

매우 달라 보여서 전혀 다른 종으로 여겼던 이 조류가 바로 포르피라의 2배체였다. 포르피라가 만들어 내는 과포자가 굴껍데기나 조개껍데기 위에서 발아하면 콘코셀리스가 되고 콘코셀리스가 만들어 내는 각포자가 포르피라로 자라는 것이었다!

캐슬린은 이 연구결과를 1949년 ‘네이처 Nature’지에 발표했다. 그리고 1952년 영국 해조류 학회의 공동창립자이자 1대 회장이 되었다. 그 후에도 맨체스터 대학에서 평생 연구를 계속했고 2700종 이상의 해조류 샘플을 채집하여 분류했다.

4. 1948년 태풍강타로 전멸한 일본 김양식장에 도입된 캐슬린 연구성과

캐슬린은 1957년 별세했다. 평생에 걸친 노력과 연구성과는 학계에서 인정과 존경을 받았다. 다만 영국사회는 김을 먹지 않아 대중들에게 캐스린의 연구성과는 알려지지 않았다.

캐슬린의 연구성과는 나중에 일본에 도입되어 구원투수가 되었다. 1948년 극심한 태풍이 일본 해안을 강타해서 김 양식장들이 모조리 파괴되고 연안이 오염되어 초토화되었다.

이때 캐슬린과 친분이 있던 세가와 소키치 규슈대학 교수가 1949년 발표한 캐슬린의 논문을 일본에 소개했다. 이를 토대로 일본 학자들이 1953년 김의 인공파종 기술을 개발해 냈다. 이후 이 기술은 일본을 넘어 한국에 전파되어 김양식 산업에 혁명을 일으켰다.

일본 구마모토의 ‘우토시’는 김양식으로 유명하다. 이곳 바다 ‘아리아케 해’가 내려다 보이는 바닷가에 스미요시 신사가 있다. 일본인들은 이 신사에 기념비를 세워 캐슬린 드루베이커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5. 영국 해조류 생산 2012년부터 1인독점채취 공급

일부 웨일즈인들에 외에는 영국인 누구도(다른 유럽국가도 마찬가지) 해조류에 관심도 없었고 채취해 먹을 생각도 안 했다. 해조류 식용을 꺼리던 영국인에게도 작은 변화가 일었다.

해조류의 힘을 일찍이 인지한 영국인 변호사 로리 맥피(Rory Macpy)가 퇴직 후 당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재가를 받아 2012년부터 현재 영국의 해조류 생산과 유통을 독점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육지는 민간의 사유지로 인정하지만 해안가, 해역, 해저 대륙붕 등은 아직도 영국 왕의 소유이다. 해상풍력등 온갖 해상개발은 왕실 자산관리 기관인 크라운 부동산(Crown Estate)을 통해 왕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2012년 9월 잉글랜드의 리저드 반도(Lizard Peninsula)를 영국에서 최초로 해조류를 채취할 수 있는 곳으로 허가한 바 있다.

로리 맥피가 최초로 채취권을 요청해서이다. 맥피는 해초를 채취해서 건강식품으로 소개해 고가로 최고급 식당과 호텔에 납품하고 있다. 아직 시장의 수요는 크지 않다. 로리 맥피 이외에 영국 내 해초류를 전문적으로 양식하거나 자연채취하는 사업자는 없다.

허가 없이 개인이 해안가에서 해조 채취는 불법이고 판매도 불법이고 적발 시 벌금과 영업정지를 받는다. 아직 해초 음식은 영국에서 일반적이지 않고 해조류 산업은 비중이 적다.

한국이 영국으로 건어물 수출을 늘리고 있으나 아직은 물량이 미미하다. 이미 영국의 큰 마트와 거래를 튼 일본의 유타카가 김, 쌀 심지어 일본산 김치까지 납품하고 있다. 필요하면 적국에게도 배워야 한다.

기후변화 등으로 식량위기가 오면 창의력이 뛰어난 영국인들이 해조류 산업에 눈을 돌릴 것이다. 이때 한국이 기술을 준비해 뒀다가 언제든 영국과 합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캐슬린 드루베이커가 한국인이 매우 다양한 해조류를 세계에서 가장 많이 먹는 걸 모르셔서 애석하다. 한국의 김밥, 김부각, 김구이, 김조림, 김냉국, 김자반, 김말이, 미역국, 다시마 튀김, 파래무침, 쇠미역쌈, 모둠 해조 샐러드 등 다양한 해조류 음식을 대접받으셨다면 한국인에게 엄지 척하셨을 것이 분명하다

(참조 LeiJournal, wikipedia, 맨체스터 대학교 사이트, 시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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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싸고 귀한 김이 식탁에서 흔해진 배경에는 영국 여성 생물학자가 있다. 캐슬린 드루베이커가 해낸 김의 생태 연구가 있다. 김 씨앗의 존재를 밝히고 어떻게 생육하는지 꼼꼼히 기록을 남겼다.

영국 과학자 캐슬린 드루베이커의 김 생태 연구를 바탕으로 태풍으로 초토화된 일본에서 김 씨를 뿌리는 양식법을 개발해 내게 되어 김양식의 획기적인 전기가 되었다. 한국이 김양식을 더 발전시키자 식탁이 풍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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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런던에 살면서 한국인으로서 보고 느끼는 영국 영어와 영국 문화에 대해 글로 적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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